힘과 규칙

(ERRATA)

책 소개

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진다면 국제질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아마 많은 국제정치 논평가들은 이에 대해 미국과 중국 중심의 양극질서가 나타날 수 있다거나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으로 나눠지는 다극질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국제정치 논평가들이 잘 말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미중의 양극질서나 미중러구의 다극질서가 주변 비강대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냉전시기 소비에트 연방이 주변 국가들에게 강요한 제한주권(limited sovereignty)이 될 것인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주장했던 종주권(suzerainty)이 될 것인지, 아니면 냉전 시기 미국이 자신의 동맹국들에 대해 가졌던 패권(hegemony)이 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적어도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완충국(buffer state)으로 만들기 위한 “특별군사작전”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힘과 규칙: 국제질서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은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직면한 도전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국제질서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Part I에서 제시하고 있다. 『힘과 규칙』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국가들의 동의 또는 재가에 의해 등장한 규칙(rules)을 통해 국가 간 관계를 조직하고자 하는 국제질서 이념’으로 정의된다. 반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등장과 진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경쟁적 이념을 통칭하여 세력권 질서(sphere-of-influence order)라고 정의한다. 세력권 질서는 ‘강대국들이 각자의 군사적 영향력이 미치는 특정한 지리적 영역 내에서, 비강대국에 대한 통제와 타 강대국의 개입 배제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 국제질서이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Part II에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떠받쳐 온 대내적 요인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 국가에서 유지되어 온 “개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제시된다. Part II는 미국의 무역정치를 중심으로 개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유권자들과 미국정치에서 약화되고 위축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국제질서들은 강대국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였다. 그 질서는 강대국의 힘이 쉽게 투사될 수 있는 경계 안에서는 위계적이었고 그 밖에서는 배타적이었다. 제국, 패권, 보호령, 봉신국, 신탁통치국, 위성국가, 종주권, 공동통치(condominium), 그리고 조공관계(tributary system)와 같은 개념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 간 관계를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으로 보고 힘이 투사되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불간섭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세력권 질서에서는 군사력으로 표현되는 “힘”이 국가 간 관계 형성의 기본 원칙이 되고 질서에 대한 중요한 결정권은 “힘”의 우위에 있는 국가가 갖는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시도한 체코슬로바키아를 1968년 소련의 탱크가 제압할 때 그것은 소련 세력권의 문제였고 다른 강대국들이 간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국제관계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합의된 “규칙”에 의해서 조직하고자 하는 이념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국제기구에 대한 위임, 국제법이나 국가 간 협정과 같은 계약, 시장을 통한 거래와 같은 다양한 비위계적 방법을 이용하여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한다. “힘”을 가진 국가들이 자유주의 국제질서 안에서 더 큰 영향력과 이익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영향력과 이익이 부여되고 행사되는 과정은 정해진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칙은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스스로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자기실행력(self-enforcement)을 갖게 된다. 세력권 질서 역시도 특정한 규칙을 생성해 내지만,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규칙은 포괄성, 명시성, 투명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세력권 질서의 규칙생성 방식과 중요한 차별성을 갖는다. 


제관계에서 “힘”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에 대항하는 “규칙” 중심의 질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의 건국과 함께 유럽대륙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왔고 20세기 초에 윌슨주의와 그 뒤에 전개된 일련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수립하려는 노력 속에서 구체적인 국제제도와 국제법으로 하나씩 구체화되었다. 특히 2차 대전 과정에서 영국과 소련의 세력권 부활 시도를 견제하며 윌슨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의 노력은 UN과 브레튼우즈 체제, 그리고 다자주의 무역체제라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제질서에 대한 논쟁을 접할 때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등장하고 확산되는 과정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의 기원이 된 3.1운동은 윌슨의 14개조에 고무된 바 크며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의 한국 독립에 대한 연합국 대표의 서명 역시 전후 세계를 세력권 질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에 대한 UN의 다국적군 파병은 집단안보에 대한 윌슨주의적 실험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현실화된 것이며, 한국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자 문화대국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환경 역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미국과 유럽의 세력권으로 치부하고 그 쇠퇴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한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수정사항



167쪽의 그림 7-3에서 그림의 점선이 잘못 표시되어 있습니다. 의회 중위 투표자가 아니라 민주당 중위 투표자로부터의 최단거리입니다.